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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_Shape_Issue/03_Knowledge & HR

테라로사 대표 김용덕

by 스타트업_디벨로퍼 2020. 12. 20.

존경하는 이유 

1. 새로운 이직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조흥은행 은퇴 후 새로운 2막 

2. 바리스타 교육으로 강릉에 카페거리를 만들었따. 

3. 비전과 이상향이 현대카드 에르메스라고 할 정도로 자부심이 있다. 

4. 문화를 바꿨다. 강릉이라는 도시를 커피의 도시로 바꿨고, 

이에 안주하지 않고 맛, 커피하우스의 인테리어, 디자인, 등을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중

5. 커피빈, 스타벅스와 동일하게 직영점으로 운영하며 사원복지에 힘쓰고, 정규직으로 한다. 

6. 커피라는 분야에 전문성과 끈기 그리고 철학이 모두 있다. 

7. 르완다와 같은 곳에 가서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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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기업인 테라로사 대표 김용덕 

n.news.naver.com/mnews/article/009/0003939800?sid=102

 

[Weekend Interview] 강릉을 카페로 만든 남자, 김용덕 테라로사 대표

"돈 세는 일 21년 했는데 커피? 운명처럼 만났죠" 강원도 강릉에 대해 가졌던 과거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바다, 신사임당, 감자, 단오… 그 정도다. 지금 사람들에게 강릉에 대해 묻는다면 10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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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세는 일 21년 했는데 커피? 운명처럼 만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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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농장 부부의 이름을 따서 그가 네이밍한 `온두라스 마리&모이` 커피를 든 김용덕 대표. 그는 "가장 맛있는 커피는 한잔의 차를 마셨을 때처럼 깔끔하고 개운한 커피"라고 강조했다. [한주형 기자]강원도 강릉에 대해 가졌던 과거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바다, 신사임당, 감자, 단오… 그 정도다. 지금 사람들에게 강릉에 대해 묻는다면 10명 중 8~9명은 단박에 '커피'라고 대답할 것이다. 카페거리를 중심으로 인구 22만 도시에 커피전문점 400여개가 성업 중이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걸작을 가능하게 한 '검은 액체', 바흐의 '커피 칸타타'에 영감을 준 '마법의 열매'. 대가를 더 대가답게 만들어주는 것, 그게 커피다. 커피 콩 한 알 생산되지 않는 강릉이 '커피의 도시'라는 근사한 칭호를 얻게 된 것은 이 사람의 공이 작지 않다. 김용덕 테라로사 대표(56). 그는 21년간 다닌 은행을 그만두고 마흔 무렵인 2002년 강릉에 커피를 볶는 공장을 열었다. 고급 커피 생두를 로스팅해 팔며 바리스타 교육도 병행했는데 그에게 배운 문하생들이 잇달아 카페를 창업하면서 강릉이 커피의 고장으로 변신했다. 특히 안목해변에 생긴 커피거리는 명소가 됐다.

테라로사는 강릉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구정면 어단리에 둥지를 틀고 있다. 시내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오가는 외곽이지만 승용차나 택시로 이곳은 찾는 외지인은 갈수록 늘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커피향이 진동했다. 여기서 하루에 1.5t가량의 원두를 볶으니 그럴 수밖에. 카페, 로스팅 공장 옆 유리온실에는 제법 키가 큰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카페 앞 작은 밤나무 숲 건너편으로 거의 공사가 마무리된 대형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띄었다. 김 대표가 손수 도면을 그리고 3년째 짓고 있는 이 건물에는 카페, 레스토랑, 커피박물관, 도서관, 공연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일대가 그야말로 '테라로사 빌리지'가 되는 것이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심어놓은 아담한 중정(中庭)에서는 야외 공연도 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꿈꿔온 가장 이상적인 '커피 왕국'을 이곳에 구현하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커피는 나의 힘, 나의 삶"

카페에 앉자 '온두라스 마리&모이'라는 커피가 나왔다. 커피농장 부부의 이름을 따서 그가 네이밍한 것인데 온두라스 커피경진대회에서 1등을 한 커피라고 했다. 쌉싸름하면서도 맑은 맛이었다. 그는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브라질 등 13개국에서 연간 600t의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를 수입하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란 생두 재배부터 로스팅 등 모든 순간에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서 만든 커피로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 평가에서 80점 이상을 맞아야 한다. 매장에서 취급하는 원두들은 산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고른 것들이다. 김 대표는 최근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와 르완다 산지에 다녀온 얘기부터 꺼냈다.

―르완다에 무슨 일로 갔나.

5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헨베 마을에서 원두를 수입하고 있다. 교복을 주면 아이들이 학교에 더 잘 온다고 해서 피아노와 교복 1000벌을 증정했다. 손열음 씨가 피아노 공연도 열었는데 아이들이 피아노 옆에 모여들어 관심을 표했다. '수천 개의 언덕의 나라' 르완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선물한 것이 뿌듯하다. 커피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다.

―커피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98년 외환위기 때 조흥은행에서 명예퇴직했다. 39세 때였다. 와이프에게 알리지않고 오랜 꿈이었던 미술 공부를 위해 미술학원에 한 달 다녔다. 강릉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마쳤지만 주간대학에 다녀보고 싶어 시도했는데 그것도 그만뒀다. 1년간 놀다가 속초에 돈가스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 후 서울 유명 식당에 들러 음식을 먹어보니 '너무 뭘 모르고 일을 벌였구나' 싶었다. 내 식당의 맛과 디자인이 형편없다는 것은 깨달았다. 해외 맛집을 돌아다녔다. 커피에 관심을 가진 것은 후식 커피를 맛있게 제공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일본 커피하우스를 둘러보다가 그 고급스러움에 깜짝 놀랐다.

―국내 커피산업이 낙후돼 있던 때였는데.

▷국내 커피 시장의 95%를 동서 커피믹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오사카, 고베 등 항구를 중심으로 고급 커피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다. 숯불로 생두를 볶는 고베 '하기하라' 커피점의 문화는 감동과 충격을 안겨줬다. 한 나라의 산업이 이웃 나라보다 이토록 뒤떨어질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2년 강릉에 공장을 차리고 일본에서 원료를 받아 로스팅했다. 강릉에 시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카페, 레스토랑 등에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카페는 커피향을 맡고 찾아와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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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수요가 생긴 것은 언제였나.

▷처음에는 수요처가 없어서 고전했다. 핵심부터 공략하자는 생각에 당시 잘나가던 서울 청담동 레스토랑 안나비니를 두드렸다. 매니저를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한 끝에 성공했다. 안나비니에 원두를 납품하면서 커피맛이 입소문을 탔고 신라호텔, 앰배서더 등에도 줄줄이 들어갔다. 그 무렵 직접 운전하며 서울의 호텔과 카페 등에 로스팅한 커피를 날랐다. 1년에 7만~8만㎞를 뛰었다.

―시행착오도 많았을 텐데.

▷일본에서 원료를 받아 쓰다가 2008 COE(Cup of Excellence)라는 국제커피선발대회에 참가한 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의 인텔리젠시아, 스텀프타운 같은 스페셜티 커피 회사의 커피를 맛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시장조사를 하지 않고 유럽 커피숍과 일본만을 돌아보고 사업을 한 게 실수였다. 몇 년간을 허송한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직접 산지를 찾아가서 원두를 구매했고 새로운 루트도 개척했다. 비로소 커피맛을 품평할 수 있는 혀를 가지게 됐고, 산지 농부들과도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구매자가 맛을 식별할 능력이 없으면 사기를 당하기 쉽다.

―맛있는 커피가 따로 있나.

▷커피는 세계적인 음료이고 객관적인 품질이 있다. 우리가 커피맛을 말할 때 주관을 많이 개입시키지만 좋은 와인이 있듯 커피도 스탠더드가 있다. 좋은 커피는 많이 먹어본 사람이 안다. 국산 포도주만 먹어본 사람이 로마네콩티의 가치를 알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훌륭한 커피는 어떤 커피인가.

▷마치 맑은 차를 한잔 마셨을 때처럼 커피맛이 깨끗해야 한다. 커피의 맛에는 수확부터 세척, 건조, 보관, 로스팅 등 커피 잔에 담기기까지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더러운 물에 씻고 아스팔트 위에서 말렸다면 커피에 그게 다 배게 된다. 천천히 자라면 커피의 밀도가 있고, 고지대에서 자란 커피가 향이 더 나올 확률이 크다. 커피도 과일이기 때문에 단맛이 나야 한다. 너무 달면 역겹고 단맛이 산과 조화를 이뤄 새콤달콤해야 한다. 아로마, 입안을 꽉 채우는 마우스필(mouthfeel), 애프터 테이스트도 중요하다.

―사업하며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2007년 청담동에 열었던 카페가 망하고 난 후 빚이 25억원까지 불어난 적이 있었다. 원두가 막 팔려나가면서 흑자가 나기 시작할 때였는데 은행에서 상환 압박이 거세지면서 힘든 상황에 처했다. 다행히 금융권에 있던 친구들이 보증을 서줘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 강릉에서 시작했나.

▷강원도에서 자랐다. 20대 때 시골인 구정면에 땅 520평을 샀다. 은퇴하면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겠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커피 공장을 짓기로 결심하면서 자연스럽게 여기로 결정됐다. 추가로 땅을 매입해 확장 중이다. 산책이 가능한 공원처럼 만들고 있다.

 

―전국에 매장이 많이 늘었는데.

▷예술의전당점·여의도 등 서울에 4개, 강릉에 3개, 양평, 제주, 부산 등 현재까지 10개가 문을 열었다. 이태원, 판교, 남산길 등도 개점을 앞두고 있어 6월 말이면 13개로 늘어날 예정이다. 모두 직영점이고 프랜차이즈에는 관심 없다. 돈이 된다고 막 열지는 않는다. 직원들을 철저히 훈련해 현장에 투입해야 한다. 15세기 베네치아 알디네 출판사의 슬로건인 'slowly slowly but quickly'가 내 경영철학이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빨리 끝내는 방식이다.

―직원은 얼마나 되나.

▷직원 200명은 모두 정규직이다. 직원들에게 아파트 등 사택을 제공하고 자녀 대학 학비도 지급하고 있다. 직원들의 주택·교육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내가 기업 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매출 추이는.

▷지난해 매출은 243억원으로 전년(195억원) 대비 24.6% 늘었다. 스타벅스는 지난해 매출 1조원을 넘겼지만 전혀 부럽지 않다. 수익의 상당 부분을 미국 본사에 로열티로 지급하고 있지 않은가.

 "미술관 같은 커피공장…맛도 멋진 공간에서 탄생하죠"

 "공장이 미술관 같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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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팅 공장은 환했다. 로스팅 기계 2대와 믹싱 기계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 복층 형태의 공장 윗부분에는 미술 서적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김 대표가 세계 각국을 돌며 사 모은 구형 커피 그라인더, 각종 연장도 전시돼 있어 공장이라고 부르기에는 지극히 예술적이다. 그는 "커피 공장이 미술관 같으면 좋겠다"며 "옆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면 꼭 그렇게 만들겠다"고 했다. 그의 관심은 커피에서 건축, 미학, 예술로 급속도로 옮겨가고 있다. 커피맛은 기본이고, '특별하다고 느끼는 공간'이 제공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산 수영점은 고려제강의 공장 터라는 데 착안해 오래된 철판으로 커피바와 테이블을 만들었고, 양평 서종점도 복층 구조의 개방감 있는 인테리어를 선택했다. 독특한 인테리어를 위해 그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빈티지한 소파, 100년 묵은 잡지, 가죽 가방 등을 대거 수집하고 있다. 기계체조 도구인 '도마'도 끔찍이 좋아해 여러 개 사 왔다. 강릉에 새로 지은 건물의 배치에서도 인테리어, 예술적 공간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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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간이 중요한가.

▷강릉이 커피의 도시라고 하지만 스텀프타운이 있는 포틀랜드, 인텔리젠시아가 있는 시카고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 커피는 맛뿐 아니라 커피하우스의 인테리어, 디자인 등 '공간의 미학'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그 가치가 완성된다. 오스트리아의 한 시인은 "네가 가는 카페가 어딘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공간의 의미를 강조한 말이다. 프랑스의 살롱, 미국의 커피하우스 등에서 활발한 토론과 교류가 이뤄지면서 문명이 꽃을 피웠다. 테라로사 커피맛은 이제 고객들도 인정한다고 자부한다. 지금은 공간에 대한 갈망이 크다.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이 내 공장이었으면, 런던의 대영박물관, 뉴욕의 모마(MOMA)가 내 카페였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파리 들라크루아 박물관, 오랑주리 미술관 등에 크게 영감을 받아서 여러 차례 다녀왔다.

―커피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커피 때문에 역사에 눈뜨게 됐다. 커피의 역사는 르네상스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로렌초 데메디치 등의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문화, 예술, 디자인, 건축에 대한 관심과 욕심도 이때 생겼다. 커피 애호가로 알려진 고종이 등극하던 1863년 영국에서는 지하철이 생겼고 미국에서는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는 20대 나이로 영국으로 유학 가 서구 문물을 접하고 존왕양이론자에서 개국론자로 입장을 바꿨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의 틀을 그가 짰다. 고종이 유학 가서 신문물을 일찍 접하고 근대화에 앞장섰다면 한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리더에 따라 조직의 운명과 경쟁력이 바뀐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됐다.

―인생에서 커피는 어떤 의미인가.

▷커피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커피 공부를 하면서 스케치할 수 있는 능력, 건축 도면을 볼 수 있는 능력 등 몰랐던 나의 재주를 발견했다. 커피 덕분에 내가 이토록 열정적인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됐다.

―앞으로 강릉의 신축 건물은 어떻게 꾸밀 것인가.

▷커피와 책, 미술, 음악이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지난해 5월 손열음 씨가 피아노 공연을 열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기업이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쟁 상대는.

▷커피 회사로는 없다. 올해 시무식에서 직원들에게 우리 경쟁 상대는 현대카드와 에르메스라고 얘기했다. 현대카드는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디자인, 북 라이브러리 등에서 앞서가고, 에르메스는 모두의 로망이자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명품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13세기 이탈리아 건축가인 아르놀포 디 캄피오는 '뒤따라오는 자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준 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도 그처럼 후배들에게 앞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김용덕 대표는

1960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강원도 묵호와 강릉에서 자랐다. '아이스케키' 장사, 신문 배달을 해야 할 만큼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오징어를 말려 팔면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집에서는 늘 오징어 냄새가 가득했다. 강릉상고를 졸업한 후 조흥은행에 취직해 21년간 은행원 생활을 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명예퇴직했다. 속초에 돈가스 레스토랑을 차린 후 맛있는 후식 커피를 연구하다가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2년 강릉시 구정면에 커피가 잘 자라는 '붉은 땅'이라는 의미의 '테라로사' 커피 공장 겸 카페를 열었다. 브라질어로는 '희망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다. 현재 전국에 10개의 직영매장을 열었다. 그는 지금 최고의 커피맛과 공간 미학으로 테라로사를 명품화하는 데 꽂혀 있다. 상징적인 도시이지만 커피맛은 최악인, 프랑스 파리에 커피숍을 내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다.

[강릉 =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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