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_Shape_Issue/03_Knowledge & HR

코로나 그리고 경신 대기근

by 스타트업_디벨로퍼 2020. 12. 19.

암기식 교육에 치중되어 있는 한국식 역사 교육에서 빠진 한가지가 있다. 

1670년 경신 대기근 

어쩌면 한국의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세대가

 

태양활동의 감소로 인해서 소빙하기가 생겨나고, 지구의 대류 감소와 화산재등으로 인해서 햇빛 감소로

농작물의 기근이 나타나고 결국 1년 + a에 이르는 최악의 기근이 있었던 1670년 이다. 

 

단순히, 가뭄인줄로 알았는데, 엄청난 수준의 우박,서리,가뭄,홍수,해일,메뚜기떼가 있었던 최악의 년도였다. 

조정에서는 구휼미를 베풀었는데,

그 와중에 폐사한 소와 돼지를 먹다가 인간에게 전염된 조선판 흑사병으로 불리던
구제역까지도 퍼져서 더더욱 심각했던....
(임진왜란이 더 나았다고 할정도이니....)

 

조선의 인구가 100만명이 사라진 (축소한게 이정도니 노비, 아동 포함하면 200만명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런 역사의 뒤안켠에 리더는 무엇을 해야했는지 생각해보면, 
단순 기근이야 리더들에게 영향이 없다지만 전염병이 말도안되게 심각하여, 

한성과 창덕궁까지도 퍼졌고, 

 

이런 여파로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관리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임금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영의정인 허적은 열네번이나 사직서를 썼다고...)

 

일을 제대로 안해서 압도적인 재앙이라 손을 쓸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나, 

과연 그렇게 넋놓고 봤어야 했나에는 의문이 든다. 

당시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의 쌀을 수입자하고 현종에게 건의했지만,

조정은 운송과 후환을 두려워해서 반대했고,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반대했다.

 

명분에 집착하여 이런 사태가 심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과연 신하들이 굶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선택하였을까 싶다. 

 

그런데, 그 이후 1695년에는 을병대기근이 발생하고 141만명 사망, 25만 명 추가 사망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쌀 3만석을 수입했는데도 그랬다고 한다.)

 

국내에 코로나 19가 터지고, 초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끼지 않았고,

티비를 보면 마스크를 끼지 않는 연예인들을 종종 보곤 한다. 

결국 서민,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한들, 

지배층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피해는 백성들이 다시 맞이하기 마련일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이고 수평적인 관계에 놓여있지만, 
이런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 여야할것없이, 부자/거지할 거없이

모두가 힘을 써서, 최대한 빨리 타개하고 싶다.  

 

코로나 백신도 조급히 수입이 되서 병상대기자 사망 속보가 나오지 않기를....

 

www.youtube.com/watch?v=mb9Vh1kGalQ&feature=youtu.be

 

반응형